東坊哲學院

기타/나의 수필

소나기

경덕 2020. 5. 12. 11:25

절기상 "우수"에 쓴 수필입니다.

오늘은 우수다. 절기로는 입춘 다음에 오는 일 년24절기 중 두 번째 절기다.

우수와 경칩에는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우수에는 한 겨울에 내렸던 눈과 얼음이 녹아내리고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는 시기인 것이다.

이때부터는 천지에 있는 음양의 기운이 만물을 소생시키고 길러주는 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더욱 초목을 윤택하게 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꽃샘추위도 기승을 부리는 겨울과 봄의 경계선에 서 있는 묘한 시기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특별한 일도 없이 사무실에 일찍 출근하여 사무실 정리를 하고는 고객관리대장을 뒤적이고 있다. 후드득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니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소나기가 내릴 때면 늘 생각나는 잊지 못할 과거가 나를 추억 속으로 안내하곤 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잊지 못할 추억을 곱씹어 보게 된다. 달콤한 추억일 수도 있고 씁쓸한 추억일 수도 있는 추억 속의 추억이다. 더욱이 엄지와 검지사이의 움푹한 나의 오른쪽 손등에 선연하게 나 있는 손톱자국을 볼 때면 더욱더 생생하게 나를 추억 속으로 안내한다,

10년하고도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내 나이 50대 후반 때의 일이다.

평소에 부동산에 관심이 많고 또한 투자도 틈틈이 하는 40대 후반의 여성이 내 사무실에 자주 들렀었고, 업무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가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 희자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날은 후덥지근한 8월 중순이었다. 마침 남원 쪽에 투자대상으로는 안성맞춤인 토지가 있어서 그녀에게 좋은 투자처가 있으니 현장을 보겠느냐고 제안을 했더니 흔쾌히 함께 가보겠다고 해서 내차로 현장을 답사하게 되었다.

남조로를 따라 남원읍 태흥리에 있는 토지를 보고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조로의 중간지점에 왔을 때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윈도 브러시를 최대한으로 돌려도 앞이 캄캄해서 앞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도저히 한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억수로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차를 소롯길로 들어가서 정차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면 그칠 줄 알았던 비가 멈추질 않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칠흑 같은 대낮에 둘만이 차속에 고립되고 만 것이다. 그녀가 두렵다, 무섭다, 피곤하다고 하면서 내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닌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부등켜 안은 채로 있었다. 그 상태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흘렀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머리가 어지럽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불현 듯 머리에 스친다.. 소년소녀가 수숫단 속에서 함께 했지만 아무 탈 없이 소나기가 그치자 소녀를 업고 개울물을 건너는 모습을 연상해 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도 생각이 났다.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유혹했던 고사가 생각이 나게도 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황진이의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당시 송도 인근에는 지족선사라는 아주 유명한 스님이 있었다. 그는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벽만을 바라보며 10여 년을 묵언수행(黙言修行)하고 있었다.

황진이는 홀로 지족선사가 수행하고 있는 굴로 찾아간다. 마침 비가 내려 황진이의 몸은 흠뻑 비에 젖었다. 겉옷을 벗어 들고 하얀 속옷, 치마, 저고리. 비에 젖은 그녀의 몸매를, 아니 알몸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벽면을 향하여 앉은 지족선사의 옆에 살포시 다가간 황진이, 결국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품에 무너지고 만다. 이때 생긴 말이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인 것이다.

이 순간 내가 이 여인을 범해야 하는가, 그냥 품에 품고 있어야만 할 것인지, 마음속의 갈등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못했다. 칠흑 같던 어둠이 걷히고 소나기도 멈추었다. 덩달아 우리도 꿈에서 깨어났다. 나의 오른손 등어리에 생긴 조그마한 핏자국이 나의 눈을 멈추게 하였다. 그녀의 손톱자국인 것이다. 그녀와 폭우 속에서 만난 간이역에서의 사연. 훔치지 않고 무사히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던 추억이 이렇게 소나기가 내릴 때면 그녀를 생각나게 한다. 그집 앞을 지날 때면 더욱더 그녀를 생각나게 한다. 그럴 때마다 스마트폰을 뒤적인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뒤적이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나기가 내릴 때면 그때 잠깐 머물렀던 간이역을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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