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坊哲學院

기타/나의 수필

동백꽃

경덕 2017. 3. 30. 10:38


 


 오늘은 2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었는데 날씨가 매서운 바람과 함께 함박눈이 휘날리는 전형적인 겨울 날씨를 보이고 있다,

아침에는 아내가 정성으로 준비한 식탁에 앉아서 정갈하게 삶은 양배추와 구수한 된장에 쌈밥으로 정말 포식했다.

“나 어렸을 땐 이런 양배추는 입에 댈 수도 없었어요. 양배추를 캐고 난 자리에 뿌리를 캐다가 삶아서 먹었던 기억을 하니, 오늘은 양반이 따로 없는 것 같구려” 양배추에도 감회가 새로웠다.

“그땐 다 그렇게 살았어요.” 아내가 공감하는지 옛날 얘기는 서러우니 그만하라는 눈치를 준다,

  사무실에 출근하고 서류를 챙기고 밖을 내다보니 눈보라가 앞을 가릴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 이렇게 눈이 내리면 나도 모르게 고독을 씹느라고 밖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오늘도 가까운 ‘신산공원’으로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장갑도 끼고 등산화까지 챙겨서 눈길을 밟으면서 신산공원으로 갔다.

추위와 눈보라 때문인지 산책하는 사람들이 없다. 눈보라를 헤치면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동백꽃이 하얀 눈으로 갈아입었다. 발길을 멈추고 동백꽃 가까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꽤 그렇게 멈추어 있었나 보다.

 “무싱거 허멘?”(무엇 하고 있느냐?) 평소에 알고 지내던 동내 어른의 인기척을 듣고서야 제 정신이 돌아왔다.

눈 쌓인 동백꽃은 나에게 트라우마라고 하기까지는 그렇지만 유년의 아린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60여 년 전, 그때도 오늘처럼 눈보라가 휘날렸다. 종일 내려서 외출이 힘들 정도로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저녁에 할머니께서(나는 어려서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때만 하더라도 땔감이 귀한 때여서 보리까끄래기로 굴묵(온돌방을 따스하게 하기위하여 불을 때는 곳)에 불을 지폈다.

 온돌을 지피기 위해서는 들이나 길에서 소똥을 모아다가 말려서도 사용하고, 보리타작이 끝난 까끄래기를 모아 두었다가 사용하였다.

따뜻하게 잠을 잤다. 잠결에 목이 따갑고 호흡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눈을 떠 보니 메케한 연기가 방안에 가득했고 창호지에 불이 붙어 깜짝 놀랐다.

정신없이 마당으로 나와 보니 우리 초가집이 화마에 휩싸인 것이 아닌가? 동도 트기전의 새벽이었다. 그야말로 불길은 온통 하늘을 뒤덮는 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띠로 엮은 초가집이라서 흙벽만 덩그러니 남았다. 할머니는 마당을 두드리면서 대성통곡을 하셨지만 일곱 살이던 나는 막연한 불안으로 벌벌 떨면서 눈물을 훔쳤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린 내가 걱정이라면서 이웃집 아주머니가 발가벗은 나를 담요로 둘둘 말고는 피신시키려고 등에 업고는 헐레벌떡 달려서 가까운 친척 할아버지 댁에 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대문 앞에서 화재사고를 들은 친척 할아버지는 본체만체 문도 열어 주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문전박대를 받았다는 설움이 밀려왔다. 어느덧 동이 터서 사방이 밝아왔다.

돌담장에 눈을 품은 동백꽃이 애련한 눈길인 양 울담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아주머니는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 집 아들의 헌옷을 빌려 입은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악착같이 살아서 저 할아버지네 보다 더 잘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얼마나 다짐하고 또 했던가.

성장하면서 생활신조를 ‘그래 악착같이!’로 평생 지니고 있다.

 오후가 되어 눈발이 그쳤다. 겨울이라고 해서 주야장창 눈만 내리면 그건 봄을 기다리는 겨울이 아닌 거다.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희미해도 반가웠다.

산책을 끝내고 사무실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찻잔에 차를 따랐다.

회한에 잠겨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안온하다. 이사야 선지자의 어록에는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라고 했다.

그래도 눈 내리는 날 동백꽃을 볼 때마다 그 시절로 돌아간 나는 벌거숭이 울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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