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坊哲學院

기타/나의 수필

노출

경덕 2020. 3. 27. 21:46


  오늘이 입동이다. 입동이라고 해서 별다른 감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벌써 내의를 꺼내 입었다. 단풍을 낙엽으로 벗은 나무들이 안쓰럽다. 애틋한 가을도 이제는 놓아 주어야 할까 보다.

자주빛 억새꽃은 단풍이나 낙엽을 알고 있을 뿐, 흰빛 머금은 억새꽃이라야 이 강산 눈보라 계절을 안다기에 카메라를 등에 지고 노을 녘 들판을 헤매다가 늦은 저녁을 먹고 잠을 청하고 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으로 치닫고 있는데 밖이 무척 소란스럽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고성방가하는 사람들, 저마다 회한을 토해 내는지 연인과 팔짱을 끼고 비틀거리는 젊은이들은 가는 세월을 가로등 아래 남기려고 하는지 부둥켜안고 오래 서 있다. 취객이 무단 횡단을 하고 있다.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긴 하지만 밤늦게까지 생업전선에서 졸음을 잊어야 하는 복에 겨운 취객들은 빈 택시가 눈앞으로 다가가도 횡단보도에 나 앉았으니 분통이 터지는지 클랙션을 마구 눌러댄다. 도무지 시끄러워서 잠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목이 좋아서 점포를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을 것 같아 마련한 3층건물인데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주변이 소란하면 불면의 밤이 많아졌다. 창밖의 소음을 잠재우지 못하는 한, 이 밤도 편안하기는 다 틀렸다. 그래도 화장실 입구를 알리는 작은 등까지도 끄고 잠을 청해 보았다.

오늘도 백야를 창조해야 할 것인가. 어쩔 수 없다면 즐기라는 명언따라 서재에서 책을 골랐다. 읽은 만한 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멀리했던 사진촬영에 관한 참고서적을 꺼내 들었다. 반가웠다.

읽으면서 불면의 시간을 태워야겠다. 사진의 귀재 브라이언 피터슨이 펴낸

노출의 모든 것이라는 책이다. 혹 오해가 있을지 몰라서 사족을 달아야 될 것 같다. 제목이 노출의 모든 것으로 되어 있어서 야한 서적으로 느낄까 하는 조바심에서 해명하련다. 여기서의 노출은 홀랑 벗는다는 의미의‘nude'가 아니라 사진기술에서 촬영상소자에 감광되는 빛의 양을 말하는 ’exposure'이다.


  사진에 나올 장면을 예측하고, 조리개를 조절하여 초점을 확인하는 방법과 사진기의 노출상태나 적정노출을 표시해주는 노출계를 비롯하여 노출의 3요소인 조리개, 셔터속도, ISO에 따른 빛 흡수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설명과 어떻게 해야 심도 깊은 사진을 얻을 수 있는지 렌즈의 초점거리. 카메라와 피사체와의 거리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고, 단렌즈, 줌렌즈, 망원렌즈의 촬영기법까지 다양하게 사진 촬영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사진작가로 취미생활을 하다 보니 사진에 관한 독서는 숙면을 취한 상태처럼 마음이 상쾌하다.


 어떻게 하면 정확한 노출과 창조적인 노출을 찾아내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것인가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기 쉽게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이 새삼 고마웠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조리개 선택을 잘 해야 하고 셔터속도를 잘 맞추어야 하며, 감도를 잘 조정해야 명화를 만들 수 있듯이 인생도 나라는 뷰파인더와 아름다운 피사체인 그대와의 만남이 무척 중요하며, 가장 예술적인 존재가치가 될 수 있는 타이밍 또한 중요함을 배웠다. 더하여 빛과의 조우를 위한 시간선택과 셔터속도 맞추기처럼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조율도 잘 해야 멋진 인생을 창출할 수 있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깨우침이 있을 때마다 지나온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그때 그렇게 할 걸, 바로 잘 할 걸, ~걸 하는 뉘우침이 자꾸만 활자에 오버랩 되고 있다. 이런 회오도 삶의 보람이기에 그러려니 하고는 있지만.


 워낙 낙천적으로 살아 왔고 또, 낙천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나로서는 쓰린 과거들이 오늘처럼 밀물처럼 밀려들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나를 이렇게 까지 위축시키는 분위기는 그냥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시간은 벌써 새벽으로 흐르고 있다. 내일을 위해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하겠다. 하지만 밖은 아직도 소란스럽다.

귀마개와 눈가리개를 하고 잠을 청하지만 산란한 마음까지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술에 의지해야 할 것 같다. 취해서 잠을 청해야 하겠다.

어쩔 수 없이 나의 오랜 벗인 술을 멀리 할 수는 없나 보다.

                                                                                     (2019년 입동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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