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坊哲學院

기타/나의 수필

여인과 제주 (월간 "국보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작)

경덕 2016. 11. 18. 22:06

 

  오늘은 붉은 잔나비해로 첫날이다. 출사 일정을 정하고는 붉게 떠오르는 먼동을 그리며 상큼한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서귀포 해안절경인 돔베낭골로 향했다. ‘돔베낭골이라는 제주어는 동백나무 골짜기로도 풀이할 수 있는데 제주 올레길 7코스로 바다경관이 절경인 외돌개가 있는 삼매봉 해안에서부터 주상절리가 빼어난 돔베낭골 해안까지 이르는 길이다. 외돌개는 외로운 돌이 서 있는 해안 포구로도 유명하다.

  새해가 밝으면 마음의 명소처럼 이곳을 찾는다. 물새 한 마리만 날아도 절로 풍경이 된다는 문섬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더군다나 사진가들은 이곳에서 떠오르는 오여사(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이 마치 그리스 문자의 오메가와 닮은 모습이어서 오메가 또는 오여사라고 부른다.)를 만나려고 많이 찾는 곳이다. 이러한 기대를 갖고 갔으나 흐린 날씨로 인하여 오여사는 만나지 못하였다.

  푸른 물결 너머로 싱싱한 새해아침의 기를 받았다고 마음의 위로를 삼으면서 식당에 갔다.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억양으로 보아 경상도에서 온 여성들인가 보다.

제주바다가 너무 좋다며 왁자지껄한 대화로 떠들썩하여 귀와 눈이 캄캄하다.순두부백반을 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살펴보니 관광객들이 식사를 거이 마치고 태반이 손거울과 콤팩트 속으로 빠져 들었다. 슬쩍 훔쳐보니까 묘한 느낌이 든다. 검은 연필로 눈썹을 짙게, 아이샤도우를 그려 넣고 있는가 하면, 루즈로 위아래 입술을 조금 바르더니 위아래 입술을 스스로 오므리면서 골고루 번지게 하고는, 양볼을 붓끝으로 토닥이면서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아름다움을 한껏 창조하고 있다. 는 시간도 공간도 초월하는 여성의 원초적 본능이 아니던가.

 식사를 마치고 제주시로 돌아오는 길에 제2횡단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눈 덮인 백록담을 감상했다. 눈속에 얼음줄기를 내민 상고대와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피어오른 눈꽃, 류시화 시인이 쓴 하이구가 생각난다. ‘봄에 피는 꽃들은 겨울 눈꽃의 답장이라는, 눈꽃을 카메라 앵글에 담고 집에 왔다.

  아내가 화실에서 말을 건넨다. 가까이 갔다. 콤팩트 대신에 팔레트를, 눈썹연필 대신에 그림붓을 들고 캔버스에 겨울풍경을 묘사하고 있었다.

제주도 여신인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의 딸들인 오름들이 정감이 넘치도록 곳곳에 솟아나면서 제주도의 풍광의 깊이를 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에 몰입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은 여전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랑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애틋한 감정이 넘실거린다.

저 손길이 나를 위하여 정성을 다해 주는데....’

어찌 불편이 없으랴마는 불평 없이, 가난이 생활을 속였던 젊은 날도 불만 없이 오직 나를 위하여 평생을 함께 하고 있으니...., 그 손으로 나의 어머니인 한라산과 내 누이들인 오름을 신년 소망으로 화폭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새해 첫날이라서 그런가, 나 또한 감성이 유별나서 오름 탐사 기념사진들을 꺼내 본다. 저 깊은 허공에 실구름으로 울을 두르고 솟아 오른 제주의 오름들은 내가 보채면 안쓰럽다고 업어 주었던 누님들 등처럼 포근하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 이웃 누나들이 그렇게 나를 아껴 주었다. 소년이 되어 큰아버지를 따라 목장에서 소를 돌보면서 오름을 자주 올라 다녔고, 초가집을 일 새(삘기)를 베려고 마차도 끌고 촐왓(소나 말에게 먹이는 풀이 있는 밭)에도 자주 다녔다.

 나이가 들어서 가정을 꾸리고 직장생활을 마친 후 사진촬영을 취미로 하면서 사진작가가 되었다. 당연히 오름을 앵글에 담기를 좋아 했는데, 368개나 되는 제주의 오름은 저마다 능선이 아름답다. 또한 용암이 분출하면서 생긴 분화구에 핀 들꽃은 렌즈만 들이대도 마냥 멋진 작품이다.

 아내의 그림에도 보인다. 오름 등성이에 굴절하는 겨울 햇살, 야윈 억새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결, 섬들이 사는 수평선 위로 하늘빛이 맑고 청량하다.

코발트색 제주바다는 어린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고향을 떠난 어머니의 아련한 얼굴을 닮았다. 외로움이 그리움을 키웠듯이 고독을 알아야 지혜의 씨앗을 키운다는 명언처럼 제주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아내가 그린 오름 기슭에도 나를 향한 염원이 보이는 듯, 구슬붕이가 이슬을 꿰고 곱게 피어 있다. 어쩌면 아내가 그려낸 제주풍경은 내 얼굴을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과 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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