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坊哲學院

기타/나의 수필

하얀 침묵

경덕 2016. 11. 17. 16:34

 

  요사이 날씨가 지구 온난화 때문에 겨울 같지 않아서 눈을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새벽부터 제주에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해안까지도 하얀 눈이 쌓일 정도로 꽤나 많은 눈이 내려 설국을 그려내고 있다

 국내 뉴스로 미국항공우주국 기상위성들이 지상7km 상공에서 동토의 칼바람이 빗살구름을 만들고 세차게 휘감고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찍은 항공사진을 보여 주면서 한파의 위력은 한반도 북쪽부터 드러납니다. 압록강과 청천강이 서해와 만나는 서한만도 고드름 얼 듯 유빙이 쭉쭉 뻗었습니다.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한강과 임진강, 하얗게 떠다니는 강 얼음들은 우주에서도 보일 정도입니다. 잠잠하던 남녘은 몰아친 눈구름에 어느새 하얀 설원으로 바뀌었습니다라고 생생한 날씨 보도를 하고 있다.

  내일은 오랜만에 설경도 촬영할 겸 영실 쪽으로 산행을 해보아야 되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했다. 가까운 타이어점에 가서 스노우타이어도 갈고, 겨울산행에 필요한 장비들과 촬영장비도 구색을 갖추어 사전 준비를 마치고는 들뜬 기분으로 잠을 청하였다.

이튿날 새벽, 차를 몰고 영실 쪽으로 출발하였다. 제설작업을 하였다고는 하나 기온이 낮은 새벽에 살얼음이 낀 길이라서 운전하기가 여간 쉽지가 않았다.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모처럼의 설경을 촬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가 아쉬워서 저속으로 천천히 1100도로 휴게소까지 올라갔다. 일단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미리 보아둔 겨우살이가 피어 있는 쪽으로 가 보았다. 겨우살이가 감은 큰 나무 가지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눈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겨우살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영실 쪽으로 올라가려는데 입산이 통제되어 등산은 포기하고 뒤돌아 오는 길에 어리목 계곡의 설경을 촬영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어리목 입구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어리목 계곡으로 들어섰다.

  능선을 타고 계곡으로 들어서니 눈이 무릎까지 올라온다. 위기가 기회라는 생각을 하면서 설경을 촬영하려면 이 정도 위험은 무릅써야 한다고 물이 얼어 있는 계곡까지 전진하였다. 바람이 불었다면 수평으로 휘날렸을 함박눈이 춤을 추면서 빗살무늬로 흩날린다. 고요한 설국에 천사들이 산신령을 위한 잔치를 벌이고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사방팔방으로 흩날리는 눈송이가 마치 천사들의 깃털로 보인다.

  고요한 정적에 쉬고 있던 공기들도 눈보라 윤무에 놀라서 계곡을 맴돌고는 능선을 타고 올라간다. 마치 기다렸다가 등장하는 무희처럼 겨울바람도 허공을 질주하듯 세차게 나타났다가 급전직하로 다시 계곡으로 내려앉는다. 흩날리는 눈에 눈사람처럼 서서 감상하는 동안 시간이 꽤나 흘렀다. 계곡 바위 사이로 돌아서니 빙벽이 된 절벽이 눈앞에 우뚝 솟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정신이 아득했다. 절벽에 그려진 형상에서 무슨 악기소리가나고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이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카메라 렌즈를 그쪽으로 맞추다가 잠시 내려놓았다. 눈에는 수정 같은 눈물을 길게 늘어뜨리고 나를 응시한다. 나도 눈으로 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만큼 환상적인 광경이다. 다시는 찾지 못할 망각의 동굴 속에 고이 잠들어 있어야 할 그니가 이 설경의 뒤안길에서 나와 함께 하얀 침묵을 탐닉하고 있다. 이제는 달콤한 타인, 어쩌지 못할 추억의 여인인데......

  그니와의 추억을 찾아냈다. 이 하이얀 설원에 추억을 한올한올 풀어헤쳐 함께 뒹굴어 본다. 그때는 엄동설한이 몰아치는 한라산 영실계곡이었다. 작품사진을 찍는다고 가지고 간 실내의만 입게 하고는 빙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속의 그니, 몸마저 차디차게 얼었나 보다. 설원으로 올라서서 하산을 서두르면서 그니를 내 등에 업었다. 그니의 가슴으로부터 전해내려 오는 전율 같은 체온이 나의 등을 통하여 가슴까지 온몸을 뜨겁게 달구었던 추억, 그 추억이 멀리서 보이는 바람 까마귀 비상처럼 나의 뇌리를 스친다. , 이 순간에도 저만치서 노루 한 쌍이 소리 내며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어찌할 것인가. 그리움은 산도 바다도, 이 설원에서 눈사람이 된다고 한들 그니가 아니므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설경의 감흥이 오히려 애틋한 추억을 반추할 뿐, 보고 싶어도 마음일 뿐이고 사진일 뿐이라고 촬영은 하지 않은 채 삼각대를 접었다. 저 고드름처럼 굵은 그니의 눈물, 빙벽처럼 차디찬 표정을 떠올리며 다시 망각의 동굴 속으로 보내야만 하는, 나도 눈보라처럼 하얀 침묵을 영영 지켜야 한다. 모두들 사랑을 하고 가슴속에 상처와 추억을 안고 살아가리라 믿는다. 나 또한 그렇게 스쳐갈 인생인 것을! , 현실은 진실, 빙벽에 아름다운 꿈을 새기고 하산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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