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坊哲學院

기타/나의 수필

가로등

경덕 2016. 11. 15. 21:28


     가을이 깊다. 깊어서 쌀쌀해지고 있다.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전남 장성의 백양사 일대에 펼쳐진 단풍풍경과 담양의 메타쉐콰이아 가로수길을 촬영하기 위하여 사진동호회인 <한장의 미학>이 주관하여 마련한 11월 정기출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무박2일의 일정이다. 서울에서 오후 늦게 버스로 출발, 버스에서 잠을 자고 백양사와 메타쉐콰이아 가로수길을 촬영한 후 오후 9시경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빡빡한 일정의 출사 나들이다.

서울에 12시에 도착했다. 지인들이 고맙게도 공항까지 나와 반가이 맞아 준다. 버스에 탑승할 시간까지는 다른 볼일을 봐도 될 만큼 여유가 있다. 지인들과 셋이서 남대문 카메라 매장에 들러서 가지고 간 카메라 청소도 하고 남대문 시장의 골목길 식당에서 꼬리곰탕으로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경복궁을 한바퀴 돌아보기 위하여 지인의 승용차로 경복궁으로 향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광화문과 경복궁 쪽 가는 길엔 시위대와 경찰이 서로 방벽을 치고 있어 들어 갈 수가 없었다. 마침 민중총궐기대회로 인하여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바꾸어 차를 안전하게 주차를 한 뒤 삼청동 뒷골목이나마 걸어서 돌아보기로 했다. 삼청동 뒷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 도심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해서 뜻밖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서니, 담벼락엔 붉은 옷으로 단장한 담쟁이가 문어가 발을 벌린 것처럼 달라붙어 있다.

기와마저도 깨진 고옥의 뜰에는 감나무가 색이 바랜 엽서처럼 생긴 단풍잎으로 포근하게 홍시를 품고 있고, 은행잎이 무더기로 쌓여있는 댓돌에는 키우던 고양이가 수명을 다하자 뒤뜰에 묻고는 일주기를 지냈다는 흔적으로 사연을 적어 붙인 지전과 몽땅초가 버려져 있다.

  을씨년스럽고 스산한 서울 뒷골목의 가을, 이 가을이 눈에 밟혀 여러 컷으로 연속 촬영하느라고 꽤나 시간이 흘렀나 보다. 어느덧 주위는 컴컴해지고 가로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드문드문 오고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 간간이 흩뿌리는 빗방울이 가을을 재촉하는 듯하다.

일행중에 젊은 사진가는 가로등 너머 저편으로 보일듯 말듯 앞서가고 있다.

한 폭이 실루엣이다, 조금씩 내 오른쪽 팔에 온기가 느껴진다. 정희라고 하는 여자 사진가가 발소리를 죽이면서 다가와서 살며시 팔장을 낀 것이 아닌가?

 이 상황은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왠지 싫지가 않다.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라고나 할까, 나 또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본다. 발랄하고 애교가 만점인 그녀가 오늘따라 무작정 예쁘다.

젊은 시절 나에게

오늘은 발렌타인데이에요.”하면서

얼굴을 붉히며 다가왔던 순희가 그녀의 얼굴 위로 오버랩 된다.

그때는 보슬비를 맞으며 가로등 불빛 아래서 밀어를 나누었었지. 그렇게 그녀와의 뜨거운 만남은 다음해 가을에 이별로 결말이 났는데, “영원한 직장에 취직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마지막 통보를 받을 때까지 뿐이었다. 뜨거운 만남이었던 만큼 엄동설한풍 같은 이별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 시절 가수 하남궁이 불러 힛트한 번안곡 음악은 흐르는데는 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듯 애절하게 심금을 울려 지금도 우울한 날이면 독백처럼 부르는 나의 애창곡이다. 오늘도 마음속으로 그 노래를 애타게 불러 본다.

가로등 하얗게 졸고 있는 이맘때쯤이면 또 네 생각

오늘도 내일도 내 할 말은 어이해 못 잊나 더뮤직 플레이

잊는다 잊으리 돌아서도 왜 이리 못 잊나 또 네 생각

오늘도 내일도 내 할 말은 너만을 사랑해 더뮤직 풀레이

갑자기 아이, 아파하는 정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의 귓전을 때리고 나서야 잠깐 나갔던 정신이 되돌아왔다. 그녀의 손을 나도 모르게 힘껏 쥐었었나 보다. 오늘도 가로등은 예전처럼 하얗게 졸고 있다. 길거리의 안전등이라지만 때로는 추억속의 회상 매개물로 자리매김하곤 한다.

  가로등 아래를 오래 서성이고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과 기다리다 지쳐 홀로 거니는 이별의 모습도 연상된다.

가을밤 가로등 불빛에 붉게 타오르는 감나무 잎이 더 또렷하건만 출사용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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